스물 네 살에 먹었던 렌즈콩 스프

대학교를 졸업하고 2년정도 되었을까. 사회 초년생이었던 스물 네 살의 나는 사표를 내고 집에서 뛰쳐나와 뉴욕 맨하튼의 한복판으로 이사를 간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실도피와 막무가내의 반반이었다. 전혀 장래에 대한 생각이 없이 그저 회사의 지루한 직장생활이 너무 싫어서 다 때려치우고 뛰쳐나왔다. 사무실에서 앉아 있으면 혼자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며 ‘나 여기 있기 싫어’,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돼나’ 하면서 머리 속에서 내 인생을 욕하고 있었다. 4년동안 경영학 공부해서 겨우 취업이 된 회사의 일자리를 그렇게 포기해 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미성숙한 선택이었지만 그때는 아주 내 자신이 영특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1년정도 저축해 두었던 월급이 있었으니 그걸로 먹고 살고 월세도 내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일자리가 없는 대신 웨이터 아르바이트 라도 하면서 푼돈이라도 벌고 남은 시간에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습해서 미국 예능계에 도전해보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게 어렸을 적 나의 터무니 없는 작전이었다. 그래도 내 꿈이었기에 도전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즐겁고 보람 있지만 전혀 돈이 되지 않는 예술이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3-4년안에 크게 성공해서 글로벌 스타가 되는 미국 코미디언들의 이야기들이 있는데 현실은 그렇게 심플하거나 쉽지 않다. 오늘날도 밤만 되면 맨하탄의 텅텅 빈 코미디 클럽을 떠돌며 4-5명의 관객앞에서 “5분 공연” 을 하는 불쌍한 ‘코미디언 지망생(aspiring comedians)’ 들이 있다. 20대 초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그 숫자는 아마 맨하탄만 쳐도 3000명은 넘을 것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매일매일 무대위에서 노력해봐도 유명해지기는 커녕 한 두명이 웃을까 말까, 욕이나 안 먹는게 다행이었다. 

저금해둔 돈은 1년도 안돼서 쏜살같이 사라졌다. 아르바이트 하던 곳은 꽤나 고급인 모던 한식 레스토랑이었는데 하도 오너와 웨이터 선배들에게 구박을 받고 욕을 먹어서 몇 개월 안돼서 또 뛰쳐나왔다 (이것이 나의 패턴이었다).  그것도 그런게 나는 아르바이트를 별로 해본 적이 없어서 웨이터로 일하면 뭔가가 재미있고 사무실과 다르게 사람들과 소통하며 더 활발할 줄 알았다. 활발은 개뿔. 팁으로 먹고 사는 웨이터들의 서비스 직업은 사무실보다 훨씬 더 조심해야 되고 실수하기가 쉬웠다. 접시를 떨어뜨리고 음식 오더 잘못 입력하고 손님들과 키친 스태프 사이에서 쌍방으로 구박받고 정말 펑펑 울면서 그만두었다. 우습게도 사무실에서 앉아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때는 2012년 12월. 입김이 보이도록 춥고 하얀 눈의 흔적이 길거리에 남아있었던 겨울 저녁이었다. 백수가 된 나는 처량하게 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래도 “뉴요커” 라는 체면은 있었기에 겉멋은 들어가지고 이사 직후에 산 비싼 가죽 크로스백에 아르마니 익스체인지의 청색 자켓을 입고 다녔던게 생각난다. 브라이언트 파크 공원의 한복판에서 행사를 하고있었다. 길거리 상인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핫도그나 할랄 푸드등의 음식을 팔고 있었는데 냄새가 좋아서 그 쪽으로 걸어갔던게 생각난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길거리 음식점은 유난히 비싸고 외국인 관광객들 등쳐먹기로 유명해서 쥐똥만한 에피타이저 하나에 7-8불 정도는 된다. 전혀 살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구경이라도 하려고 심심풀이로 걸어 다녔다. 

중동 음식점이 하나 있었다. 40대 정도 되어보아는 중동인 아저씨가 렌즈콩 스프를 커다란 냄비 안에 끓이고 있었다. 냄새가 좋았다. 호기심 있는 얼굴로 그 음식점을 잠시 맴돌고 구경하고 있으니 그 아저씨가 손으로 “Come” 하고 제스처를 했다. 

“죄송한데 진짜 돈 없는데요. (Sorry, I really don’t have money)” 라고 말했다. 

“됬어. (it’s fine)” 하고 아저씨가 종이컵 안에다가 스프를 듬뿍 넣어서 건내주었다.

그냥 친절한 사람이었는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그 행사 자체에 손님이 많이 없었다. 남은 스프를 그냥 어떻게 처분하려고 나한테 좀 나눠주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눈물이 펑펑 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나는 그 때 사랑과 관심에 굶주려 있었던 가보다. 하고 싶은 코미디는 전혀 풀리지도 않고 직장도 그만두고 한두달의 월세를 낼 수있 는 능력도 없어 정말 갈 길이 막막하고 내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아랍인 아저씨는 그런 내 사정을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그 때의 따뜻한 렌즈콩 스프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익숙지 않았던 중동음식의 향기가 새로웠다. 색깔은 카레처럼 갈색과 노랑색의 조합이었다. 내가 맛있게 스프를 흡입하고 있으니까 아저씨가 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이슬람교 에서는 궁핍한 사람은 도우라고 그러거든? (In Islam, we say, give freely to the needy.)” 

내가 하도 궁핍해 보였나 보다. 

어렸을 때 실수투성이였고 욕심만 많고 미성숙했던 나. 

생각해보면 이런 낯선 사람의 친절도 나를 구원해주는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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